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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비석을 읽다④] 누가 월성의 비석을 산산조각 냈나

해자·배수로 교란층서 나온 비편…원래 세워졌던 자리는 아직 미확인 450년 고구려 장수 피살·464년 ‘수탉 사냥’ 뒤 파괴됐다는 해석 “인위적 파손 가능해도 시점·주체 단정 어렵다”…두 조각이 남긴 마지막 질문 비석은 글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주 월성에서 나온 이 비석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몸체는 사라지고 손바닥만 한 두 조각만 남았다. 1937년과 2020년, 83년의 간격을 두고 발견된 두 조각은 다시 맞춰졌지만 왜 비석이 산산이 깨졌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가, 언제, 왜 이 비석을 깨뜨렸을까. 1937년 월성 일대에서 수습된 비편과 2020년 계림~월성 진입로 발굴조사에서 나온 비편을 맞춘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 두 비편을 맞춘 크기는 가로 27.19㎝, 세로 16.58㎝다. 1937년 비편은 ‘서월성지(西月城址)’에서 수습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해자 배수로의 교란층에서 나왔다. 두 조각은 2025년 3차원 스캔과 공동조사를 거쳐 본래 하나였음이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두 조각이 발견된 곳이 비석이 처음 서 있었던 자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2020년 비편은 특정 고대 문화층이 아니라 이미 뒤섞인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1937년 비편의 발견 장소 역시 기록마다 ‘서월성지’, ‘월성산’, ‘월성성지’, ‘반월성지’ 등으로 달리 나타난다. 월성 서쪽에 비석이 세워졌다는 추정도 있지만, 현재 자료만으로 정확한 입비 지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월성 내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온다.       경주 월성 해자 일대.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의 해자 배수로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동경지 깨진 비석에서 ‘의도적인 파괴’를 읽다 그렇다면 비석은 자연스럽게 깨진 것일까.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자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두 ...

[깨진 비석을 읽다④] 누가 월성의 비석을 산산조각 냈나

해자·배수로 교란층서 나온 비편…원래 세워졌던 자리는 아직 미확인 450년 고구려 장수 피살·464년 ‘수탉 사냥’ 뒤 파괴됐다는 해석 “인위적 파손 가능해도 시점·주체 단정 어렵다”…두 조각이 남긴 마지막 질문 비석은 글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주 월성에서 나온 이 비석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몸체는 사라지고 손바닥만 한 두 조각만 남았다. 1937년과 2020년, 83년의 간격을 두고 발견된 두 조각은 다시 맞춰졌지만 왜 비석이 산산이 깨졌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가, 언제, 왜 이 비석을 깨뜨렸을까. 1937년 월성 일대에서 수습된 비편과 2020년 계림~월성 진입로 발굴조사에서 나온 비편을 맞춘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 두 비편을 맞춘 크기는 가로 27.19㎝, 세로 16.58㎝다. 1937년 비편은 ‘서월성지(西月城址)’에서 수습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해자 배수로의 교란층에서 나왔다. 두 조각은 2025년 3차원 스캔과 공동조사를 거쳐 본래 하나였음이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두 조각이 발견된 곳이 비석이 처음 서 있었던 자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2020년 비편은 특정 고대 문화층이 아니라 이미 뒤섞인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1937년 비편의 발견 장소 역시 기록마다 ‘서월성지’, ‘월성산’, ‘월성성지’, ‘반월성지’ 등으로 달리 나타난다. 월성 서쪽에 비석이 세워졌다는 추정도 있지만, 현재 자료만으로 정확한 입비 지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월성 내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온다.       경주 월성 해자 일대.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의 해자 배수로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동경지 깨진 비석에서 ‘의도적인 파괴’를 읽다 그렇다면 비석은 자연스럽게 깨진 것일까.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자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두 ...

[깨진 비석을 읽다③] 신라 왕성 월성에 고구려 비석이 서 있었다고?

광개토왕비 닮은 글씨에 ‘ 고구려비 ’ 가능성 제기 돌은 경주 남산 화강암 … “ 신라인이 고구려 서풍 받아 썼을 수도 ” 17 자 흔적뿐인 작은 파편 … 비석을 세운 주체 놓고 해석 엇갈려   신라 천년 왕궁 월성에서 나온 작은 돌조각을 두고 학자들은 고구려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1937 년 월성 서편에서 발견된 비편과 2020 년 월성 해자 진입로 구간에서 수습된 비편이 88 년 만에 한 조각으로 맞춰진 뒤부터다 . 두 파편에는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그런데 그 글씨가 지금까지 알려진 6 세기 신라비와는 사뭇 달랐다 .   시선을 끈 것은 중국 지린성에 서 있는 광개토왕비였다 . 1937년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비편과 2020년 월성 해자 진입로 구간에서 발견된 비편을 맞춘 모습. 두 조각은 정밀 분석을 통해 본래 하나의 비석 파편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두 비편을 합친 뒤 3 차원 스캔으로 살펴본 결과 현재까지 모두 17 자의 흔적이 확인됐다 . 그 가운데 存 ( 존 )· 稱 ( 칭 )· 白 ( 백 )· 天 ( 천 )· 貢 ( 공 )· 不 ( 불 )· 渡 ( 도 ) 등 일부 글자는 비교적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   이 글자들을 광개토왕비의 같은 글자와 나란히 놓자 닮은 부분이 나타났다 .   특히 存 · 稱 · 不 · 渡 등의 자형에서는 광개토왕비와의 유사성이 주목됐다 . 이 때문에 월성 비편이 고구려 계통의 금석문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 반면 白 · 天 을 비롯한 일부 글자는 형태와 획을 처리한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도 나타난다 . 월성비편과 광개토왕비가 같은 계통의 옛 예서체를 공유하더라도 두 글씨가 그대로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   월성비편과 광개토왕비의 글자를 나란히 비교한 자료. 두 비는 옛 예서 계통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글자의 비례와 획을 처리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도 확인된다. 학술대회 자료집 갈무리. 

[깨진 비석을 읽다②] 깨진 글자 몇 개로 1천600년 전 문장을 어떻게 읽을까

실물 ·3D 스캔에 다른 금석문 글씨까지 하나씩 비교 ‘ 存 · 稱 · 白 · 天 · 貢 · 不 · 渡 ’ 비교적 판독 의견 모여 … 나머지는 신중론   돌에 글자가 남았다고 해서 곧바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획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면 이야기는 더 어려워진다 . 남아 있는 선이 글자의 한 획인지 , 돌이 깨지면서 생긴 흔적인지부터 가려야 한다 . 비슷한 글자가 보이더라도 그것만으로 같은 글자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   경주 월성 서편에서 수습된 깨진 비석이 그렇다 .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37 년 수습된 비편과 2020 년 월성 발굴 과정에서 나온 비편은 2025 년 하나의 비석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으로 확인됐다 .   두 돌을 맞추자 이번에는 그 위에 새겨진 글자가 연구자들 앞에 놓였다 .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을까 .  

[깨진 비석을 읽다①] 88년 만에 하나가 된 두 조각…월성의 비석은 어디에 있었나

1937년 수습 비편·2020년 월성 출토 비편, 2025년 접합 확인 3D 정밀 분석으로 ‘한 비석’ 입증…원래 건립 위치는 여전히 미궁 1937 년 6 월 27 일 , 경주 월성에서 작은 돌조각 하나가 수습됐다 .   한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 깨진 면에는 먹으로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   昭和一二 , 六 , 二七 / 西月城址 / 崔   쇼와 12 년 , 즉 1937 년 6 월 27 일 . 장소는 ‘ 서월성지 ( 西月城址 )’. 마지막 ‘ 최 ( 崔 )’ 는 당시 경주에서 문화유산 조사에 참여했던 최남주 (1905~1980) 를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됐다 .   가로 13.62 ㎝ , 세로 11.13 ㎝ 에 무게는 약 1.23 ㎏ . 손에 들 수 있을 정도의 깨진 비석 조각이었다 .   돌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됐고 ‘ 경주 206’ 이라는 유물번호를 얻었다 .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 1937 년 수습된 비편 ( 오른쪽 ) 과 2020 년 월성 발굴 과정에서 수습된 비편 ( 왼쪽 ) 을 접합한 모습 . 두 조각은 2025 년 공동조사를 통해 원래 하나의 비석에서 떨어져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⑧] 쌍탑만 다시 세우면 끝일까…‘너무 높아진 절터’를 다시 손본다

금당지 토단 앞마당보다 1.326m 높아…조망·공간 비율 왜곡 지적 금당·회랑 등에 같은 초석 반복…건물 위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 연지·옛 도로도 잔디 아래 묻혀…와축기단 보호각 재검토 의견 월성~인왕동사지~남산 유적 잇는 ‘신라왕경 남부권역’ 정비 제안 경주 인왕동사지의 동·서 삼층석탑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구체화되면서 뜻밖의 문제가 하나 드러났다. 탑 주변의 절터가 너무 높게 정비돼 있다는 것이다. 인왕동사지는 2023년 1월부터 2024년 5월까지 경역 정비공사를 거쳤다. 금당지와 십자형 건물지, 회랑지 등에 흙을 덮고 초석을 새로 놓았으며 와축기단에는 보호각을 설치했다. 탐방로와 안내판, 주차장도 마련됐다. 발굴로 확인된 사찰의 위치와 규모를 현장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런데 쌍탑 복원이 가시화되자 지금의 정비방식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탑 두 기를 세우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⑦] 옛 돌 18개, 새 돌 24개…다시 세운 쌍탑은 ‘복원’일까 ‘재현’일까

쌍탑 세우려면 석재 42매 필요…남은 옛 부재는 18매 동탑 11매·서탑 13매 새로 제작해야 원형 갖춰 초음파 검사 거쳐 옛 돌 재사용…균열·파손부는 보강 학계 일각 “엄밀히는 재현”…2026년 복원정비 실시설계 경주 인왕동사지에 두 개의 삼층석탑을 다시 세우려면 얼마나 많은 옛 돌이 필요할까. 현재 남아 있는 석탑 부재는 모두 18매다. 동탑 10매, 서탑 8매다. 연구진이 남산동 서삼층석탑을 기준으로 두 탑을 노반까지 다시 세우는 안을 검토한 결과 필요한 부재는 모두 42매로 추산됐다. 부족한 24매는 새 돌로 만들어야 한다. 동탑에 11매, 서탑에 13매의 신재가 필요하다. 숫자로만 보면 동탑은 기존 부재가 약 절반, 서탑은 약 40% 남아 있는 셈이다. 다만 연구진은 기단과 탑신, 옥개석 등 탑의 규모와 형식을 판단할 수 있는 주요 부재가 상당수 남아 있어 전체 형태를 추정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봤다. 2026년에는 동·서탑 복원정비 실시설계가 추진되면서, 오랫동안 땅 위에 흩어져 있던 돌을 실제 쌍탑으로 다시 세우는 작업도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옛 돌보다 새 돌이 더 많이 들어가는 탑을 ‘복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⑥] 팔부중상 돌은 어디서 왔나…40곳 대조하니 ‘남산 서쪽’

팔부중상 면석 8점 모두 화강암류…광물·화학 특성 비교 경주 암석 노두 40곳 조사…자성·미량원소 분석해 11곳 압축 적외선 분석 더하자 GJ10·14·20·21 네 곳 남아 용장사곡~금오봉 권역 가장 유력…실제 채석장 확정은 아직 경주 인왕동사지 쌍탑을 장식했던 팔부중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돌의 성분이다. 석영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어떤 장석과 흑운모를 품고 있는지, 자기장에는 어느 정도 반응하는지, 루비듐·스트론튬·이트륨 같은 미량원소는 얼마나 포함돼 있는지를 비교하면 비슷해 보이는 화강암도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연구진은 이 차이를 따라 팔부중상을 만든 돌의 원산지를 추적했다. 출발점은 팔부중상 면석 8점이었다. 경주 일대 암석 노두 40곳과 대조한 결과 후보는 11곳으로 줄었고, 다시 세 가지 분석결과를 겹치자 네 곳이 남았다. 모두 경주 남산 서쪽이었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⑤] 신라 석탑은 원래 번쩍였나…돌에 남은 2㎝ 못구멍

옥개석마다 작은 구멍 규칙적으로 배열…일부엔 금속 흔적 구멍 내부서 납·철 확인…금속못 고정한 시설로 추정 금속판·감잡이·마감 금구로 지붕돌 장엄했을 가능성 갈항사지 석탑과도 닮은 흔적…회색 돌탑의 원형 다시 묻다 경주 인왕동사지에서 나온 삼층석탑 지붕돌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지어 남아 있다. 지름은 약 2㎝. 처음 보면 돌을 다듬다가 생긴 흔적처럼 보이지만 구멍이 놓인 자리를 따라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쪽으로 몰려 있지도 않고 제멋대로 뚫려 있지도 않다. 일정한 간격과 모양을 이루며 지붕돌 곳곳에 반복된다. 일부 구멍 안에서는 금속 흔적도 발견됐다. 발굴조사와 성분 분석에서는 납과 철이 확인됐다. 연구자들은 납을 채워 철못을 단단히 고정하고, 그 못으로 금속판이나 금속 장식물을 석탑에 붙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회색 화강암 석탑과 신라인들이 처음 바라봤던 탑의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④] 출처 몰랐던 팔부중상 8구…112년 만에 경주로 돌아왔다

1910년대 경주읍성 해체 과정서 발견…1913년 이왕가박물관 구입 인왕동사지 발굴서 같은 크기 ‘가루라·천’ 면석 확인 2009년 비교 연구로 쌍탑 한 세트 밝혀…현재 16구 중 10구 확인 2025년 국립경주박물관 임시 이관…쌍탑 복원 검토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인왕동사지 팔부중상. 1913년 이왕가박물관에 들어간 뒤 정확한 출처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왕동사지 발굴품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쌍탑을 장식했던 부재로 확인됐다. 2025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임시 이관돼 경주에서 다시 전시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돌로 새긴 여덟 얼굴이 나란히 서 있다. 갑옷을 입고 구름 위에 앉은 모습도 있고, 여러 팔을 뻗거나 손에 지물을 든 형상도 있다. 통일신라 석탑 기단을 장식했던 팔부중상이다. 이 돌조각들은 1913년 서울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에 들어갔다. 경주에서 나온 유물이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어느 절의 어느 탑을 장식했던 것인지는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 답은 거의 90년 뒤 경주 인왕동사지 땅속에서 나왔다. 같은 크기와 비슷한 조각수법을 가진 팔부중상 면석이 발굴된 것이다. 그리고 2025년 10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해온 팔부중상 8구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임시 이관됐다. 1913년 이왕가박물관에 들어간 지 112년 만이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③] 우물 속 나무쪽에 ‘大龍王’…신라인은 여기서 무엇을 빌었나

사찰 남쪽에 연못 2곳·우물 1곳…왕경 사찰서 보기 드문 배치 직경 1.5m·깊이 3.67m 우물서 ‘大龍王’ 적힌 목간 출토 육상동물·새·물고기 뼈와 복숭아씨까지 함께 나와 연구진 “일반 식수시설보다 제의 관련 시설 가능성” 경주 인왕동사지의 한 우물에서 나무쪽 하나가 발견됐다. 거기에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大龍王. ‘대룡왕’이다. 그런데 우물 안에서 나온 것은 이 목간 하나뿐이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육상동물과 새, 물고기의 뼈가 나왔고 복숭아씨도 함께 발견됐다. 물을 길어 마시던 평범한 우물이었다고 보기에는 조금 낯선 조합이다. 연구자들이 인왕동사지의 이 우물을 사찰 내 의례나 제의와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이유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②] 탑 아래 또 건물, 그 아래 또 건물…절터 밑 ‘세 겹의 시간’

금당 아래 가장 이른 건물 흔적…사찰 조성 전 10여 동 확인 7세기 후반 건물군 다시 들어서…동탑 아래에서도 선대 유구 발견 8세기 후반 금당·쌍탑 갖춘 사찰로 재편 춘양교 남쪽에서도 같은 시기 건물 집중…월성 남쪽 공간 변화 가능성 경주 인왕동사지 발굴조사 현장.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 여러 차례 건물이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경주 인왕동사지를 발굴하던 조사단은 지금 보이는 절보다 먼저 이 자리를 차지했던 건물들을 만났다. 금당 아래에서 건물이 나왔고, 그 건물 아래에는 더 오래된 기초가 있었다. 동쪽 석탑 아래에서도 탑보다 먼저 지어진 건물이 확인됐다. 한때 이름을 ‘인용사’라고 여겼던 절터를 파 내려가자, 사찰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의 공간이 층층이 겹쳐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연구자들은 인왕동사지의 건물 흔적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가장 오래된 제1기, 사찰이 들어서기 전 또 한 차례 건물군이 조성된 제2기, 그리고 금당과 쌍탑·강당·회랑을 갖춘 제3기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①] 1916년엔 ‘이름 모를 절터’였다…‘인용사’는 어떻게 붙었나

일제강점기 기록에는 ‘사명 미상 폐사지’ 1931년 들어 ‘인용사지’ 등장…지명 근거로 사명 추정 1991년 문화재 명칭으로 굳었지만 발굴 연대와 문헌 기록 엇갈려 2016년 사적 지정 때 ‘경주 인왕동 사지’로 이름 바꿔 경주 인왕동사지 전경. 사진 중앙의 정비된 구역이 인왕동사지이며 왼쪽으로 남천과 월정교가 보인다. 한때 ‘인용사지’로 불렸지만 발굴조사 이후 사명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현재는 ‘경주 인왕동 사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경주 월성 남쪽, 남천을 사이에 두고 월정교와 마주한 들판에 네모반듯하게 정비된 절터가 있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경주 인왕동 사지’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인용사지’라고 불렀다.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될 때 공식 명칭도 인용사지였다. 왜 절 이름이 사라졌을까. 그 답을 따라가면 100여 년 전 기록과 2002년 시작된 발굴조사가 만난다.

왕릉 위에 사람이 올라간 이유…경주 대릉원의 가을 ‘이발’

대릉원·황남고분군 등 14만1천㎡ 예초작업 가파른 봉분은 장비 못 올라가 작업자가 직접 예초기 메고 작업 연중 5차례 반복…대릉원·천마총 봉분만 4만6천㎡ 경주 대릉원에서 작업자가 배부식 예초기를 메고 신라 왕릉 봉분의 잔디를 깎고 있다. 경주시 제공 멀리서 보면 신라 왕릉 꼭대기에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등에는 예초기를 멨다. 작업자가 둥근 봉분의 비탈을 천천히 오르내리자 길게 자란 잔디가 한 줄씩 깎여나간다. 경주 대릉원의 가을 ‘이발’ 풍경이다. 경주시는 대릉원과 천마총, 황남고분군, 노동·노서고분 일원에서 사적지 경관 관리와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예초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지에서 잔디를 깎는 모습은 흔하다. 왕릉은 조금 다르다. 봉분이 높고 경사가 가팔라 큰 장비를 올리기 어렵다. 결국 작업자가 예초기를 등에 메고 왕릉 사면을 직접 오르내리며 잔디를 다듬는다. 사진으로 보면 한가로운 풍경 같지만, 넓이와 작업 횟수를 보면 꽤 큰 일이다.

천년 넘은 종을 왜 12번 울렸을까…성덕대왕신종의 ‘건강검진’

771년 완성된 18.9t 범종, 올해도 12차례 타종 소리·진동·맥놀이 기록해 과거 데이터와 비교 지난해 조사선 30년간 구조적 변화 없어…2029년까지 매년 점검 지난 15일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종각에서 열린 2026년 타음조사 공개회에서 타종자들이 당목으로 성덕대왕신종을 울리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5일 저녁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종각. 거대한 통나무 당목이 천천히 종을 향해 움직였다. ‘둥.’ 한 번 울린 소리는 금세 사라지지 않았다. 낮고 긴 울림이 이어지면서 소리가 커졌다 작아지는 듯한 느낌을 반복했다. 이날 성덕대왕신종은 모두 12차례 울렸다. 천년 넘은 종소리를 관람객에게 들려주기 위한 공연만은 아니었다. 종이 내는 소리와 진동을 기록해 내부 구조에 변화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학조사였다. 사람으로 치면 매년 받는 건강검진과 비슷하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지난해부터 2029년까지 5년에 걸쳐 성덕대왕신종을 정기적으로 울리고 음향·진동 특성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올해는 두 번째 조사다.

크레인 없이 1t 돌이 떴다…경주의 탑을 다시 세운 ‘드잡이’

이맛대·도르래·회롱틀로 돌 들어 옮기는 전통 석공기술 남산 석탑·감은사지 석탑·월정교 실제 복원 현장에서도 사용 “80t 열암곡 마애불도 가능할까”…74세 석장부터 25세 청년까지 기술 이어 경상북도 무형유산 경주석장 보유자 윤만걸(74) 석장. 동경지 1t짜리 화강암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돌을 들어 올릴 크레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굵은 나무 두 개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꼭대기에는 도르래가 걸렸고, 두꺼운 밧줄은 바닥의 돌을 감싼 뒤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나무 장치로 이어졌다. 지난 8월 7일 경주시 통일로 시암공방. 한낮 기온이 35℃를 오르내리던 이날 흰색 개량한복에 안전모와 장갑을 낀 사람들이 나무 손잡이를 잡았다. “애혀.” “어히야.” 몇 사람이 동시에 손잡이를 돌리자 회롱틀에 밧줄이 감겼다. 줄이 팽팽해지고 도르래가 힘을 받았다. 처음에는 꼼짝하지 않던 화강암 아래로 작은 틈이 생겼다. 조금 더 돌리자 돌이 땅에서 떨어졌다. 무게 약 1t의 돌이 허공에 떠 있었다. 경상북도 무형유산 ‘경주석장’ 제4회 공개행사에서 선보인 전통 석재 인양 기술, ‘드잡이’다. 이날 작업의 중심에는 경주석장 윤만걸(74) 선생이 있었다.

분황사에서 5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친다…‘창렬각’에 남은 1950년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한 창렬각.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지만 별도의 문화유산 안내판은 설치돼 있지 않다. 비각 안에는 1950년 무장세력의 습격으로 다친 남편 이진우를 구한 남분이씨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경지 분황사에서 황룡사지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풍경이 금세 달라진다. 9월의 황룡사지 주변에는 황화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꽃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고, 자전거를 타거나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넓은 황룡사지가 펼쳐지고 조금 더 가면 구황동 원지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으로 5분 남짓 걷는다. 관광객의 발길이 조금씩 뜸해지고, 길 옆으로 낮은 돌담과 풀밭이 이어진다. 그러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 옆에서 작은 기와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처음 보면 오래된 정자나 이름 없는 비각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낮은 담장 가운데 한 칸짜리 비각이 있고, 처마 아래에 한자로 세 글자가 적혀 있다. ‘彰烈閣.’ 창렬각이다. 이곳에서 분황사까지는 걸어서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황룡사지도 바로 옆이다. 그런데 분황사나 황룡사지를 설명하는 관광 안내판은 곳곳에서 볼 수 있어도 창렬각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알려주는 설명은 찾기 어렵다. 비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나무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안에 검은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앞면에는 세로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우리말로 풀면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다. 비석의 주인공은 영양 남씨인 남분이씨다. 신라 유적이 몰려 있는 구황동에서 만난 비석이지만, 여기에 적힌 이야기는 신라시대의 일이 아니다. 1950년이다.

돌베개 나온 신라 무덤, 117년 만에 다시 파본다

1909년 일본인 연구자들이 조사한 경주 서악동 ‘석침총’ 재발굴 당시 놓친 봉분·무덤길·제사 흔적까지 현대 고고학으로 다시 확인 일본 도쿄대에 남아 있는 1909년 출토품도 함께 조사 1909년 일본인 연구자들이 조사할 당시 촬영한 경주 서악동 석침총의 돌방 내부.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17년 전 한 차례 발굴된 신라 무덤을 다시 파본다. 경주 서악동에 있는 ‘석침총(石枕塚)’이다. 이름부터 조금 낯설다. 무덤 안에서 사람의 머리를 받치는 돌베개, 석침(石枕)이 발견돼 붙은 이름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1909년 일본인 연구자들이 조사했던 석침총을 다시 발굴한다. 이미 한 번 파본 무덤을 왜 11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조사하는 것일까. 답은 당시의 발굴 기록에 있다. 1909년 조사에서는 돌방과 주검을 놓았던 시상(屍床), 석침 등이 확인됐다. 하지만 정식 발굴보고서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 것도 일부 사진과 도면, 짤막한 보고문 정도다. 당시 조사와 기록 방식으로는 무덤의 전체 모습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국립경주박물관의 설명이다.

불 밝힌 월정교, 성곽 따라 걷는 경주의 가을밤

18~20일 경주국가유산야행…올해 경주읍성까지 밤길 넓혀 블랙이글스·미스터 두들·최태성·신병주·썬킴 등 볼거리 풍성 해가 진 뒤 불을 밝힌 경주읍성. 올해 경주국가유산야행은 기존 월정교·교촌마을에서 경주읍성 일원까지 행사 공간을 넓힌다. <경주시 제공> 경주의 가을밤이 월정교에서 경주읍성까지 이어진다. 해가 지면 불을 밝히는 월정교와 교촌마을을 중심으로 열렸던 ‘경주국가유산야행’이 올해는 경주읍성까지 무대를 넓힌다. 신라왕경 유적과 구도심의 성곽을 한데 잇는 밤길이다. ‘2026 경주국가유산야행’은 오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간 월정교와 교촌마을, 경주읍성 일원에서 열린다. 행사는 매일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진다. 경주시와 국가유산청,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경주문화원이 주관하는 이번 야행은 올해로 11회째다. 올해 주제는 ‘파편(破片)-지켜 온, 그리고 지켜낼’. 경주 곳곳에 흩어진 국가유산과 역사적 흔적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해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천년 무덤 위로 황금신발이 떠올랐다…경주 대릉원 미디어아트의 밤

90호분·미추왕릉·황남대총·천마총이 밤마다 거대한 스크린으로 27일까지 매일 오후 7시30분~9시30분…황리단길서 걸어서 이어지는 밤 산책 경주 대릉원 고분을 배경으로 신라 황금문화를 재해석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지고 있다. 경주시 제공 해가 지자 대릉원의 둥근 봉분 위로 거대한 황금신발 한 쌍이 떠올랐다. 낮에는 잔디로 덮인 고분이지만 밤이 되면 모습이 달라진다. 푸른빛이 능선을 따라 흐르고, 황금빛 유물과 신라의 이야기가 봉분 위에 펼쳐진다. 관람객들은 고분을 바라보다 하나둘 휴대전화를 들어 장면을 담는다. 경주 대릉원에서 지난 4일 시작된 ‘2026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경주 대릉원’의 밤 풍경이다. 행사는 오는 27일까지 24일간 이어진다. 매일 오후 7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대릉원 곳곳이 빛과 영상으로 바뀐다. 올해 주제는 ‘대릉원, 영원-천년의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다. 눈여겨볼 것은 따로 세운 대형 스크린이 아니라 실제 고분이 영상의 무대가 된다는 점이다. 90호분에는 경주 분지의 형성과 신라의 탄생이 펼쳐진다. 미추왕릉에서는 박·석·김으로 이어지는 신라 왕조의 기틀을 보여준다. 황남대총에는 신라가 누린 꿈과 영광을 담았고, 천마총에서는 찬란했던 황금문화를 3D 그래픽과 영상으로 다시 풀어낸다. 지난 4일 경주 대릉원 90호분 앞에서 ‘2026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경주 대릉원’ 개막 공연이 열리고 있다. 경주시 제공 고분마다 같은 영상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유적에 얽힌 이야기를 달리 입힌 셈이다. 경주 대릉원 90호분 앞에서 개막 공연이 열리고 있다. 경주시 제공 개막일인 지난 4일에는 90호분 앞에 무대가 놓였다. 정순임 명창의 창을 시작으로 선덕여왕과 김유신, 문무왕, 원효대사 등을 등장시킨 판타지 서사극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빛’이 공연됐다. 무대 뒤에는 실제 신라 고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공연과 함께 봉분 위로 영상이 번지면서 무대와 유적의 경계도 흐려졌다. 대릉원 입구에서 중앙광장까지 이어지는 길도 평소와 다르다. 반딧불을 닮은 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