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자·배수로 교란층서 나온 비편…원래 세워졌던 자리는 아직 미확인 450년 고구려 장수 피살·464년 ‘수탉 사냥’ 뒤 파괴됐다는 해석 “인위적 파손 가능해도 시점·주체 단정 어렵다”…두 조각이 남긴 마지막 질문 비석은 글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주 월성에서 나온 이 비석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몸체는 사라지고 손바닥만 한 두 조각만 남았다. 1937년과 2020년, 83년의 간격을 두고 발견된 두 조각은 다시 맞춰졌지만 왜 비석이 산산이 깨졌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가, 언제, 왜 이 비석을 깨뜨렸을까. 1937년 월성 일대에서 수습된 비편과 2020년 계림~월성 진입로 발굴조사에서 나온 비편을 맞춘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 두 비편을 맞춘 크기는 가로 27.19㎝, 세로 16.58㎝다. 1937년 비편은 ‘서월성지(西月城址)’에서 수습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해자 배수로의 교란층에서 나왔다. 두 조각은 2025년 3차원 스캔과 공동조사를 거쳐 본래 하나였음이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두 조각이 발견된 곳이 비석이 처음 서 있었던 자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2020년 비편은 특정 고대 문화층이 아니라 이미 뒤섞인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1937년 비편의 발견 장소 역시 기록마다 ‘서월성지’, ‘월성산’, ‘월성성지’, ‘반월성지’ 등으로 달리 나타난다. 월성 서쪽에 비석이 세워졌다는 추정도 있지만, 현재 자료만으로 정확한 입비 지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월성 내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온다. 경주 월성 해자 일대.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의 해자 배수로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동경지 깨진 비석에서 ‘의도적인 파괴’를 읽다 그렇다면 비석은 자연스럽게 깨진 것일까.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자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두 ...
해자·배수로 교란층서 나온 비편…원래 세워졌던 자리는 아직 미확인
450년 고구려 장수 피살·464년 ‘수탉 사냥’ 뒤 파괴됐다는 해석
“인위적 파손 가능해도 시점·주체 단정 어렵다”…두 조각이 남긴 마지막 질문
비석은 글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경주 월성에서 나온 이 비석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몸체는 사라지고 손바닥만 한 두 조각만 남았다. 1937년과 2020년, 83년의 간격을 두고 발견된 두 조각은 다시 맞춰졌지만 왜 비석이 산산이 깨졌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누가, 언제, 왜 이 비석을 깨뜨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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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월성 일대에서 수습된 비편과 2020년 계림~월성 진입로 발굴조사에서 나온 비편을 맞춘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 |
두 비편을 맞춘 크기는 가로 27.19㎝, 세로 16.58㎝다. 1937년 비편은 ‘서월성지(西月城址)’에서 수습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해자 배수로의 교란층에서 나왔다. 두 조각은 2025년 3차원 스캔과 공동조사를 거쳐 본래 하나였음이 확인됐다.
중요한 것은 두 조각이 발견된 곳이 비석이 처음 서 있었던 자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이다.
2020년 비편은 특정 고대 문화층이 아니라 이미 뒤섞인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1937년 비편의 발견 장소 역시 기록마다 ‘서월성지’, ‘월성산’, ‘월성성지’, ‘반월성지’ 등으로 달리 나타난다. 월성 서쪽에 비석이 세워졌다는 추정도 있지만, 현재 자료만으로 정확한 입비 지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월성 내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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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월성 해자 일대. 2020년 비편은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의 해자 배수로 교란층에서 수습됐다. 동경지 |
깨진 비석에서 ‘의도적인 파괴’를 읽다
그렇다면 비석은 자연스럽게 깨진 것일까.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자는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두 비편의 접합면이 틈 없이 맞물리고, 조각은 작은 크기로 부서졌지만 글자가 새겨진 비면은 여전히 비교적 매끄럽다는 점 등을 근거로 자연 풍화나 지진 같은 우발적 파손보다 단단한 도구를 이용한 집중적인 타격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파괴를 5세기 신라와 고구려 관계의 변화와 연결한다.
앞선 ③편에서 살펴봤듯 월성 비편을 5세기 초 고구려가 신라 왕경에 세운 정치적 기념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해석을 받아들이면 다음 질문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해진 뒤 신라인들이 그 비석을 그대로 두었을까.
450년,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하슬라 성주 삼직이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변방 장수를 공격해 살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 북쪽을 공격했고, 신라 측의 사과 뒤 군사를 물렸다.
이 사건을 신라와 고구려 관계가 사실상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본다.
더 극적인 기록은 464년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조에는 신라에 있던 고구려 군사를 둘러싼 충돌이 기록돼 있다. 고구려가 결국 신라를 병탄할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신라 측이 암호와 같은 지시를 내려 국내의 고구려인들을 공격했다는 내용이다.
고구려 군인의 조우관을 닭의 깃털에 빗댄 데서 이를 이른바 ‘수탉 사냥’으로 설명한다. 고광의 연구자는 이 사건 직후 고구려 세력이 신라에서 축출되는 과정에서 월성의 고구려비 역시 파괴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비석을 깨는 행위가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니라 이전 지배 질서의 상징을 없애는 정치적 행위였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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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 비편의 수습과 접합 과정을 정리한 표. 학술대회 자료집 갈무리. |
그런데 ‘464년에 깨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정준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런 역사적 연결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월성 비편이 단단한 도구에 의해 물리적인 타격을 받아 부서졌다고 추정할 수는 있지만, 언제 어떤 계기로 파괴됐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추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경주에서도 문무왕릉비, 태종무열왕릉비, 성덕왕릉비 등 여러 비석이 깨진 조각으로 발견됐지만 정확한 파괴 시점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반례도 있다. 신라 입장에서 고구려의 지배와 복속을 상징하는 비석으로 해석할 수 있는 충주고구려비 역시 이후 신라 영역에 포함됐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석이 인위적으로 깨졌을 가능성과 464년 고구려 세력 축출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파괴됐다는 해석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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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과 2020년 수습 비편을 합체해 3차원으로 분석한 모습.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자료. |
이 작은 돌에는 아직 빈칸이 너무 많다.
비석을 누가 세웠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정확히 어디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문 전체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더욱 알 수 없다.
파괴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했던 5세기에 세워졌다가 양국 관계가 틀어진 뒤 깨졌을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시기에 다른 이유로 파손됐을 가능성도 있다.
분명한 것은 비석이 깨졌고, 그 조각 가운데 두 점만 지금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1937년 발견된 조각과 2020년 발견된 조각은 88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됐다.
그렇다면 월성의 땅속 어딘가에는 아직 맞춰지지 않은 다음 조각이 남아 있을까.
깨진 비석의 마지막 문장은 아직 땅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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