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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①] 1916년엔 ‘이름 모를 절터’였다…‘인용사’는 어떻게 붙었나

일제강점기 기록에는 ‘사명 미상 폐사지’ 1931년 들어 ‘인용사지’ 등장…지명 근거로 사명 추정 1991년 문화재 명칭으로 굳었지만 발굴 연대와 문헌 기록 엇갈려 2016년 사적 지정 때 ‘경주 인왕동 사지’로 이름 바꿔 경주 인왕동사지 전경. 사진 중앙의 정비된 구역이 인왕동사지이며 왼쪽으로 남천과 월정교가 보인다. 한때 ‘인용사지’로 불렸지만 발굴조사 이후 사명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현재는 ‘경주 인왕동 사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경주 월성 남쪽, 남천을 사이에 두고 월정교와 마주한 들판에 네모반듯하게 정비된 절터가 있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경주 인왕동 사지’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인용사지’라고 불렀다.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될 때 공식 명칭도 인용사지였다. 왜 절 이름이 사라졌을까. 그 답을 따라가면 100여 년 전 기록과 2002년 시작된 발굴조사가 만난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①] 1916년엔 ‘이름 모를 절터’였다…‘인용사’는 어떻게 붙었나

일제강점기 기록에는 ‘사명 미상 폐사지’
1931년 들어 ‘인용사지’ 등장…지명 근거로 사명 추정
1991년 문화재 명칭으로 굳었지만 발굴 연대와 문헌 기록 엇갈려
2016년 사적 지정 때 ‘경주 인왕동 사지’로 이름 바꿔

사진 중앙의 정비된 구역이 인왕동사지이며 왼쪽으로 남천과 월정교가 보인다. 한때 ‘인용사지’로 불렸지만 발굴조사 이후 사명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현재는 ‘경주 인왕동 사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경주 인왕동사지 전경. 사진 중앙의 정비된 구역이 인왕동사지이며 왼쪽으로 남천과 월정교가 보인다. 한때 ‘인용사지’로 불렸지만 발굴조사 이후 사명을 확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현재는 ‘경주 인왕동 사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유산청 제공


경주 월성 남쪽, 남천을 사이에 두고 월정교와 마주한 들판에 네모반듯하게 정비된 절터가 있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경주 인왕동 사지’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곳을 ‘인용사지’라고 불렀다. 1991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될 때 공식 명칭도 인용사지였다.


왜 절 이름이 사라졌을까.


그 답을 따라가면 100여 년 전 기록과 2002년 시작된 발굴조사가 만난다.


1916년에는 ‘절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인왕동 사지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기록한 자료 가운데 하나가 1916년 모로가 히데오가 펴낸 '신라사적고'다.


당시 경주지역 여러 폐사지를 조사해 흥륜사지, 영경사지, 모지사지 등 절 이름을 기록했지만 인왕동의 이 절터에는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寺名未詳廢寺址.’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폐사지라는 뜻이다.


기록에는 월성 동남쪽 논밭 사이에 조각이 있는 삼층석탑이 있었고 당시 이미 무너져 있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여기서 언급된 조각은 훗날 인왕동사지 석탑의 특징으로 확인된 팔부중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연구자는 보고 있다.


1916년 측량을 바탕으로 만든 경주 지도에서는 이곳에 인왕사지(仁旺寺址)라는 이름이 표시된다. 특정 사찰의 역사적 명칭이라기보다 당시 행정지명인 인왕리를 따라 붙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시기 자료만 보면 이 절터를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용사’라고 특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경주 인왕동사지 모습. 논밭 사이에 무너진 석탑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 인왕동사지 모습. 논밭 사이에 무너진 석탑 부재들이 흩어져 있다. 1916년 신라사적고에서는 이곳을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폐사지로 기록했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당시 사진에는 지금처럼 정비된 사역은 보이지 않는다. 논밭 한가운데 석탑 부재들이 쓰러진 채 흩어져 있다. 현재의 항공사진과 비교하면 같은 장소라고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1931년, ‘인용사지’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변화는 1931년 자료에서 확인된다.


경주고적보존회가 펴낸 경주고적급유물조사서는 이 절터를 인용사지(仁容寺址)라고 기록하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인용사 이야기를 함께 실었다.


자료집은 1931년대 일본인 조사자 오사카 긴타로가 절터가 있던 인왕리 등의 지명을 근거로 이곳을 인용사로 추정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만 1916년과 1931년 사이에 이름이 바뀐 구체적인 과정이나 이를 입증하는 고고학적 근거는 당시 자료에 상세히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인용사지라는 명칭은 여러 연구와 조사에서 반복됐다.


1970년대에도 이곳을 인용사지로 보는 견해가 이어졌고, 1991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0호로 지정되면서 인용사지가 행정상 문화재 명칭으로까지 굳어졌다.


1916년 사명을 특정하지 못했던 절터가 1931년 자료에서는 ‘인용사지’로 기록됐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왼쪽은 1916년 신라사적고, 오른쪽은 1931년 경주고적급유물조사서의 인왕동사지 관련 기록이다. 


1916년 신라사적고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폐사지로 기록됐던 장소가 1931년 경주고적급유물조사서에서는 인용사지로 등장한다.


그런데 땅을 파보니 시간이 맞지 않았다


인용사라는 이름에 본격적으로 물음표가 붙기 시작한 것은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는 2002년부터 약 9년에 걸쳐 네 차례 발굴조사를 벌였다.


금당과 동·서 석탑, 강당, 회랑, 십자형 건물지, 연못과 우물 등이 차례로 확인됐다. 그 아래에서는 사찰이 들어서기 전의 건물 흔적까지 여러 층으로 겹쳐 나왔다.


문제는 연대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인용사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아들 김인문과 관련된 사찰이다. 김인문과 직접 관련된 절이라면 늦어도 7세기 후반에는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의 설명이다.


인왕동사지에서도 7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기와와 토기, 건물 흔적은 나왔다.


하지만 초기 유구에서는 금당이나 탑, 강당처럼 사찰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핵심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성과를 종합하면 금당과 쌍탑 등을 갖춘 본격적인 사찰의 모습은 그보다 뒤인 제3기 단계에 들어서야 분명해진다. 2013년 발굴조사보고서에서도 사찰 운영기와 석탑 조성 시기를 주로 8~9세기로 제시했다.


문헌 속 인용사의 시간과 땅속에서 확인된 사찰의 시간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인용사’라고 적힌 유물도 나오지 않았다


절 이름을 확정할 결정적인 자료도 아직 없다.


황룡사지나 사천왕사지에서는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문헌 속 사찰과 실제 절터를 연결할 수 있다.


인왕동사지에서도 황룡사, 사천왕사, 도중사 등의 글자가 있는 기와가 발견됐지만, 연구자는 이들 기와를 인왕동사지의 사명과 직접 연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정작 ‘인용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기와나 금석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2009년 발굴조사 중간보고서부터 명칭 앞에 ‘전(傳)’자를 붙여 ‘전 인용사지’라고 표기한 것도 이런 의문을 반영한 것이었다.


2016년, ‘인용사’라는 이름을 내려놓다


결국 이 절터가 201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사명도 다시 검토됐다.


결론은 특정 절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었다.


문화재자료 인용사지가 아니라 현재의 위치를 따온 경주 인왕동 사지가 공식 명칭으로 채택됐다. 자료집에서도 “사적 지정 과정에서 사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최종적으로 ‘경주 인왕동 사지’라는 명칭이 채택됐다”고 설명한다.


인용사가 아니라고 완전히 결론 난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만으로 이곳을 인용사라고 확정할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연구자들은 왕궁과의 거리, 사찰의 규모와 배치, 창건 시기, 문헌 속 다른 왕경 사찰까지 다시 비교해야 실제 사명을 좁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안내판에는 인용사지가 아니라 ‘경주 인왕동 사지’라고 적혀 있다.


100여 년 전 논밭에 쓰러져 있던 석탑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땅속에서는 그보다 더 오래된 건물들이 겹겹이 확인됐다.


다음 편에서는 절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인왕동사지 아래에 겹쳐 있는 세 시기의 건물 흔적을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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