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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경주②] 경주까지 왔다, 이제 얼마나 머물까…외국인 관광의 다음 과제는 ‘체류’

경주 외국인 숙박 지표 최근 3년 새 14.1% 증가 대구공항 입국객 소비지역 5위 경주…주요 업종은 특급호텔 외국인 96.4% 여행 중 다시 검색…관광지·음식·교통 정보가 다음 행선지 좌우 경주 황리단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경주를 찾는 외국인이 늘면서 방문객을 숙박과 소비로 연결해 체류시간을 늘리는 것이 지역 관광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경주시 제공 김해공항과 대구공항에서 외국인을 경주까지 데려오는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다음은 경주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게 하느냐다. 낮에 대릉원과 첨성대를 둘러보고 부산이나 대구로 돌아가는 관광객과, 경주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저녁을 먹고 야간 관광까지 즐기는 관광객이 지역에 남기는 효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관광공사 데이터에서도 외국인의 지방여행은 ‘방문’에서 ‘숙박’으로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최근 3년간 외국인 숙박에서 비수도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39.5%에서 43.0%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경북은 14.2% 증가했고, 경북 안에서는 안동 24.1%, 경주 14.1%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한국관광공사는 중앙선·동해선 개통과 KTX 운행 확대 등 교통 여건이 나아진 데다 역사유산과 한옥, 야경처럼 한국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경주를 찾는 외국인이 늘고 있다는 것보다 눈여겨볼 대목은 경주에서 자는 외국인도 늘고 있다는 점이다.

분황사에서 5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친다…‘창렬각’에 남은 1950년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지만 별도의 문화유산 안내판은 설치돼 있지 않다.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한 창렬각.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지만 별도의 문화유산 안내판은 설치돼 있지 않다. 비각 안에는 1950년 무장세력의 습격으로 다친 남편 이진우를 구한 남분이씨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경지


분황사에서 황룡사지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풍경이 금세 달라진다.


9월의 황룡사지 주변에는 황화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꽃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고, 자전거를 타거나 천천히 산책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넓은 황룡사지가 펼쳐지고 조금 더 가면 구황동 원지가 나온다.


여기서 동쪽으로 5분 남짓 걷는다.


관광객의 발길이 조금씩 뜸해지고, 길 옆으로 낮은 돌담과 풀밭이 이어진다. 그러다 차들이 오가는 도로 옆에서 작은 기와집 하나를 만나게 된다.


처음 보면 오래된 정자나 이름 없는 비각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낮은 담장 가운데 한 칸짜리 비각이 있고, 처마 아래에 한자로 세 글자가 적혀 있다.


‘彰烈閣.’


창렬각이다.


이곳에서 분황사까지는 걸어서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황룡사지도 바로 옆이다. 그런데 분황사나 황룡사지를 설명하는 관광 안내판은 곳곳에서 볼 수 있어도 창렬각이 왜 이곳에 서 있는지 알려주는 설명은 찾기 어렵다.


비각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나무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안에 검은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앞면에는 세로로 글자가 새겨져 있다.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우리말로 풀면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다. 비석의 주인공은 영양 남씨인 남분이씨다.


신라 유적이 몰려 있는 구황동에서 만난 비석이지만, 여기에 적힌 이야기는 신라시대의 일이 아니다.


1950년이다.

경주 황룡사지 주변으로 이어지는 길과 황화코스모스 꽃밭
경주 황룡사지 주변으로 이어지는 길과 황화코스모스 꽃밭. 이곳에서 창렬각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이다. 동경지


6·25전쟁이 터지기 넉 달 전


비문에 기록된 날짜는 1950년 음력 2월3일이다.


6·25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당시 이곳 경주는 지금과 행정구역도 달랐다. 사건이 벌어진 곳은 경주군 양북면 용동리, 속칭 오암골이었다. 현재 문무대왕면 방향이다.


해방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좌우 이념대립과 치안 불안은 경주의 산골마을까지 들어와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밤이면 직접 경비를 섰다.


그날도 마을 반장이던 이진우를 비롯해 주민 10명이 경비에 나섰다.


비문에는 무장한 십여 명이 마을에 들이닥친 상황이 기록돼 있다. 경비를 서던 사람들을 붙잡아 묶었고, 총을 쏜 뒤 불까지 질렀다는 내용이다.


그날 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비석에 새겨진 몇 글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警備室九人盡死.’


경비실의 아홉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10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이진우 한 명이었다.


그도 온전히 살아 나온 것은 아니었다. 총탄이 오른쪽 무릎을 관통했다. 총에 맞고 쓰러진 채 목숨만 붙어 있었다.


지금 창렬각 앞에서 주변을 바라보면 당시 상황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한쪽에는 황룡사지의 넓은 들판이 있고 멀리 아파트가 보인다. 차량이 지나는 도로도 바로 옆에 있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1950년 한 산골마을에서 주민 10명이 밤마다 마을을 지켜야 했고, 그 가운데 9명이 한날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분황사에서 창렬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
분황사에서 창렬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 낮은 담과 들판 사이 길을 따라가면 도로변에 자리한 창렬각이 나온다. 동경지


살아남은 한 사람, 그를 찾아간 아내


비문은 여기서 이진우의 아내 남분이씨 이야기로 이어진다.


남편이 총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씨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


중상을 입은 남편을 경주로 옮겨 치료받게 했고, 치료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 있는 살을 떼어 남편의 상처 치료에 내줬다는 기록도 남았다. 엉덩이와 허벅지에서 살을 떼어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의료용어로 어떤 치료였는지는 이 비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남편의 치료를 위해 자기 몸의 일부를 내줬다는 이야기가 비석에 기록되고 지역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


창렬각 비문의 연구와 해석에 참여했던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장은 이 이야기를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조 전 원장은 “남편이 무장세력의 집중사격을 받고 크게 다쳤고, 부인이 그 남편을 구해 치료한 과정이 비문에 나온다”며 “자기 살을 내주면서까지 남편을 살렸다는 이야기가 사건 뒤에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회자됐다”고 말했다.


남편이 치료받은 곳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었다.


“부인이 남편을 구해 경주로 데려와 치료받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성병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관한 부분은 조 전 원장의 기억에 따른 것이다. 당시 의료기록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비석이 전하는 사건의 뼈대는 선명하다.


10명이 마을을 지키러 나갔다. 9명이 죽었다. 이진우만 살아남았고, 크게 다친 남편 곁에는 남분이씨가 있었다.

창렬각 정면 현판
창렬각 정면. 처마 아래 ‘彰烈閣’ 현판이 걸려 있다. 붉은 기둥과 단청이 남아 있지만 비각의 나무칠은 곳곳에서 벗겨져 있다. 동경지


왜 ‘열녀비’가 아니라 ‘창렬비’일까


경주에는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린 비와 정려각이 적지 않다.


대부분 조선시대 인물을 기록한 것이다.


창렬각은 조금 다르다.


조 전 원장은 이 비각에서 눈여겨볼 부분으로 시대를 꼽았다.


“경주에는 충·효·열을 기린 정려각이 여러 곳 있지만 대부분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창렬각은 해방 이후 사회가 혼란했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한 여성의 행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조금 다릅니다.”


창렬각의 비문에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까지 내어준 여성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그런데 비문을 읽다 보면 남분이씨 이야기만 남는 것은 아니다.


마을 반장이라는 역할, 밤마다 이어진 주민 경비, 무장세력의 습격, 10명 가운데 9명이 숨진 사건이 한꺼번에 기록돼 있다.


그래서 창렬각은 한 여성의 행적을 기리는 비각인 동시에 6·25전쟁 직전 경주 동해안 지역이 얼마나 불안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작은 기록물이기도 하다.


비석 몇 면에 당시 마을의 하루가 들어 있다.

처마 아래 ‘彰烈閣’ 현판이 걸려 있다
창렬각 정면. 처마 아래 ‘彰烈閣’ 현판이 걸려 있다. 동경지


지금 자리는 원래 자리가 아니었다


창렬각은 처음부터 지금 이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 전 원장은 과거 비각이 분황사 담장 주변에 있었다고 기억했다.


“옛날에는 분황사 담벼락에 비각이 있었습니다. 그 길이 양북으로 가는 길목이었어요. 양북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보던 자리였습니다.”


당시 양북은 현재 문무대왕면 일대다.


남분이씨와 이진우 부부가 살던 곳, 1950년 사건이 벌어진 곳도 그 방향이었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넓은 도로를 타고 이동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분황사 앞을 지나 양북으로 향하던 길목에 창렬각이 있었다면 오가는 사람들에게 이 비각의 의미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조 전 원장은 이후 분황사 주변이 정비되면서 창렬각이 현재 자리로 옮겨진 것으로 기억했다.


정확한 이전 시기와 경위는 추가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재 위치에서는 황룡사지와 구황동 원지 사이 길을 따라가다가 잠깐 방향을 틀어야 창렬각을 볼 수 있다.


관광객이 우연히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창렬각 안에 세워진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창렬각 안에 세워진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 비석에는 1950년 무장세력의 습격과 남편 이진우의 부상, 남분이씨가 남편을 구하고 치료한 과정 등이 기록돼 있다. 동경지


현판 아래 색은 남아 있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창렬각은 꽤 화려하다.


처마 아래에는 붉은 기둥과 녹색, 파란색, 주황색이 섞인 단청이 남아 있다. 현판의 ‘彰烈閣’ 세 글자도 또렷하다.


하지만 아래쪽으로 눈을 내리면 시간이 보인다.


붉은 나무살의 칠은 군데군데 벗겨졌다. 담 안쪽에는 풀이 자라 있고 비석은 창살 너머에서 봐야 한다.


비각 가운데 서 있는 검은 비석 위에는 돌로 만든 지붕 모양의 비갓이 올려져 있다.


정면에 가장 크게 새겨진 것은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


그 이름 뒤에 1950년의 사건이 있다.


비지정 문화유산인 창렬각에는 별도의 문화유산 안내판이 없다. 길을 걷다 비각을 발견하더라도 한문을 읽지 못하면 무엇을 기리는 곳인지 알기 어렵다.


분황사에서 불과 몇 분 거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매일 많은 사람이 분황사를 보고, 황룡사지 길을 걷고, 계절마다 꽃밭을 찾는다.


그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창렬각이 있다.




※ 이 글은 필자가 영남일보에 취재·보도한 [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제 살을 내어 남편을 살렸다…‘창렬각’에 새긴 1950년 그날의 취재자료와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동경지용으로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60911023058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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