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Featured Post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②] 탑 아래 또 건물, 그 아래 또 건물…절터 밑 ‘세 겹의 시간’

금당 아래 가장 이른 건물 흔적…사찰 조성 전 10여 동 확인 7세기 후반 건물군 다시 들어서…동탑 아래에서도 선대 유구 발견 8세기 후반 금당·쌍탑 갖춘 사찰로 재편 춘양교 남쪽에서도 같은 시기 건물 집중…월성 남쪽 공간 변화 가능성 경주 인왕동사지 발굴조사 현장.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 여러 차례 건물이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경주 인왕동사지를 발굴하던 조사단은 지금 보이는 절보다 먼저 이 자리를 차지했던 건물들을 만났다. 금당 아래에서 건물이 나왔고, 그 건물 아래에는 더 오래된 기초가 있었다. 동쪽 석탑 아래에서도 탑보다 먼저 지어진 건물이 확인됐다. 한때 이름을 ‘인용사’라고 여겼던 절터를 파 내려가자, 사찰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의 공간이 층층이 겹쳐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연구자들은 인왕동사지의 건물 흔적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가장 오래된 제1기, 사찰이 들어서기 전 또 한 차례 건물군이 조성된 제2기, 그리고 금당과 쌍탑·강당·회랑을 갖춘 제3기다.

[왕궁 곁 이름 잃은 절터, 인왕동사지②] 탑 아래 또 건물, 그 아래 또 건물…절터 밑 ‘세 겹의 시간’

금당 아래 가장 이른 건물 흔적…사찰 조성 전 10여 동 확인
7세기 후반 건물군 다시 들어서…동탑 아래에서도 선대 유구 발견
8세기 후반 금당·쌍탑 갖춘 사찰로 재편
춘양교 남쪽에서도 같은 시기 건물 집중…월성 남쪽 공간 변화 가능성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경주 인왕동사지 발굴조사 현장.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절이 세워지기 전부터 이곳에 여러 차례 건물이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경주 인왕동사지를 발굴하던 조사단은 지금 보이는 절보다 먼저 이 자리를 차지했던 건물들을 만났다.


금당 아래에서 건물이 나왔고, 그 건물 아래에는 더 오래된 기초가 있었다. 동쪽 석탑 아래에서도 탑보다 먼저 지어진 건물이 확인됐다.


한때 이름을 ‘인용사’라고 여겼던 절터를 파 내려가자, 사찰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의 공간이 층층이 겹쳐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연구자들은 인왕동사지의 건물 흔적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가장 오래된 제1기, 사찰이 들어서기 전 또 한 차례 건물군이 조성된 제2기, 그리고 금당과 쌍탑·강당·회랑을 갖춘 제3기다.


금당 밑에서 나온 첫 번째 건물


가장 아래층에서 확인된 대표적인 흔적은 ‘건물지11’과 ‘건물지14’다.


건물지11은 훗날 금당이 들어선 자리의 남쪽 최하층에서 발견됐다. 건물 기초는 한 변 약 6.2m의 정방형이었다. 땅을 60~70㎝가량 파고 강돌을 촘촘하게 깐 뒤 흙으로 덮고 다지는 작업을 세 차례 반복했다.


이후 바깥쪽에 줄기초를 덧대 한 변 약 8.4m 규모로 확장한 흔적도 남았다.


이런 방식은 ‘온통기초’라고 한다.


황룡사 중금당과 목탑, 분황사 창건 금당, 사천왕사 등 신라 왕경의 주요 건축물에서도 비슷한 기초공법이 확인됐다. 다만 공법만으로 건물의 정확한 성격이나 연대를 단정할 수는 없다. 인왕동사지에서는 이 건물이 현재까지 확인된 유구 가운데 가장 아래층, 가장 이른 단계에 해당한다.


같은 제1기의 건물지14는 기와를 이용해 기단을 만든 ‘와적기단’ 건물이었다.


무엇을 위한 건물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금당과 석탑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자리가 빈터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 자리에 건물이 세 번 바뀌었다


그 위에는 다시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지10이다.


발굴 현장에서는 건물지11이 가장 아래, 건물지10이 그 위, 현재 사찰 금당지가 가장 위에 겹쳐 있었다.


건물 하나가 사라진 자리에 다음 건물을 세우고, 그 건물마저 폐기한 뒤 다시 금당을 올린 것이다.


이번 기사에 사용한 발굴사진에서도 이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건물지11의 온통기초와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의 초석 적심이 한 구역에 겹쳐 있다.


건물지10에서는 많은 양의 붉게 탄 흙도 발견됐다. 연구자는 앞선 건물지11에서 발생한 화재와 관련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서쪽에서도 비슷했다.


제1기의 건물지14 위에 제2기 건물지15가 들어섰고, 그 위를 후대 사찰의 서회랑이 다시 덮었다. 층위를 따라가면 같은 장소가 최소 세 차례 다른 건축공간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동탑 아래에도 탑보다 오래된 건물이 있었다


동쪽 석탑 자리에서는 건물지13이 나왔다.


건물지13의 북쪽은 후대 동탑과 겹치고 남쪽은 십자형 건물지와 겹친다. 층위상으로는 두 시설보다 아래에 있어 탑과 사찰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건물의 시기를 짐작할 자료도 나왔다.


중심부에서 뚜껑이 있는 그릇인 ‘유개완’ 한 점이 놓인 상태로 발견됐는데, 형식상 7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함께 나온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은 750년으로 보고됐다.


이를 종합해 연구자는 건물지13이 7세기 후반 무렵 조성돼 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다가 이후 폐기된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 주변에서는 지붕에서 떨어진 기와가 그대로 흩어진 모습도 확인됐다. 남쪽에서는 붉게 탄 흙과 목탄이 함께 나왔다.


이 건물 역시 불에 타면서 폐기됐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경주 인왕동사지 발굴조사 현장. 가장 아래층의 건물지11 온통기초와 그 위 건물지10의 초석 적심, 후대 금당지 초석 적심이 한 자리에서 겹쳐 확인됐다. 2026 경주 인왕동사지 학술대회 자료집 


8세기 후반, 비로소 ‘절’의 모습이 갖춰졌다


앞선 건물들이 사라진 뒤 공간은 완전히 달라졌다.


남북축을 중심으로 금당이 들어서고 그 앞에 동·서 석탑이 마주 섰다. 뒤에는 강당이 놓였으며, 사방을 회랑으로 구획했다.


신라 왕경에서 익숙한 쌍탑식 가람의 모습이다.


연구자는 이 단계를 제3기로 분류한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기단 규모가 동서 약 21.5m, 남북 약 19.5m였다. 금당 남쪽 약 6.5m 떨어진 곳에는 동·서탑이 자리했고 두 탑 사이 거리는 약 7.7m였다.


출토유물과 건물의 중복 관계를 종합하면 본격적인 사찰 조성은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사찰은 짧게 쓰이고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석탑과 십자형 건물 주변에서 발견된 매납 토기 등을 보면 12~13세기까지 사찰이 운영됐을 가능성이 있다. 동탑 북·동쪽에서 확인된 가마의 방사성탄소연대는 1440년으로 나왔다. 연구자는 이를 근거로 15세기 중엽에는 사찰이 이미 폐사하고 이곳에 민가나 생활시설이 들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시기별 유구 변천도를 보면 이 변화가 뚜렷하다.


처음에는 몇 동의 건물이 놓였다. 그 위에 다시 여러 건물이 들어섰고, 이후에는 금당과 쌍탑·강당·회랑을 갖춘 사찰이 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한눈에 보이는 절터 아래에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물이 겹쳐 있는 셈이다.

경주 인왕동사지 제2기 유구 분포와 인근 춘양교 남쪽 유적의 건물 배치를 비교한 자료.
경주 인왕동사지 제2기 유구 분포와 인근 춘양교 남쪽 유적의 건물 배치를 비교한 자료.



인왕동사지만 바뀐 것이었을까


여기서 시야를 조금 넓히면 또 하나의 단서가 나온다.


인왕동사지 제2기에는 장방형 건물과 길게 이어지는 회랑형 건물 등이 정형화된 사찰 배치와 달리 흩어져 있었다.


비슷한 모습이 가까운 춘양교 남쪽 발굴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춘양교 남쪽에서는 7세기 후반 이후 건물이 집중적으로 들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인왕동사지 제2기 건물들이 운영되던 시기와 겹친다.


이 두 유적을 비교하면서 당시 월성 남쪽 공간 전반에 도시계획이나 공간 재편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아직 인왕동사지의 제1·2기 건물들이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왕궁과 어떤 관계였는지 역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발굴로 확인된 것은 분명하다.


지금의 절을 세운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들판을 골라 탑과 금당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랜 기간 사용되던 건물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찰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찰 남쪽에는 다른 신라 왕경 사찰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시설도 들어섰다.


연못 두 곳과 우물이다.


그 우물 안에서는 훗날 ‘大龍王(대룡왕)’ 세 글자가 적힌 목간이 발견됐다.


다음 편에서는 그 우물에 왜 ‘대룡왕’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는지, 함께 나온 동물뼈와 복숭아씨는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본다.

댓글